5월의 과학사: 너의 온도가 보여

 1964년 5월 20일, 벨 연구소의 연구원이던 아노 펜지어스와 로버트 윌슨은 이상한 신호를 하나 포착하게 된다. 안테나를 어느 위치로 돌려도 잡히던 이 정체불명의 신호는 14년 뒤 두 과학자에게 노벨상이라는 어마어마한 결과물로 돌아오게 된다. 정작 펜지어스와 윌슨은 찾을 생각도 없었고 뭔지도 몰랐던 이 신호는 당대 최고의 발견에 이르게 된다. 과연 이 신호의 정체는 무엇이었을까.

노벨상을 수상하는 펜지어스의 모습 (출처 : 벨 연구소)

 1950년대 벨 연구소가 진행하고 있던 프로젝트는 통신위성 시스템 구축이었다. 소설 속 상상의 개념이던 통신위성이 기술적으로 가능한 것인지부터 출발한 프로젝트는 최초의 능동적 통신위성인 텔스타의 발사로 이어지게 된다. ( 이전 통신위성은 그저 신호를 반사하는 수동적 기능만 있었다. ) 이러한 통신위성 기술을 발전시키려면 필연적으로 좋은 수신기가 있어야만 했다. 그때 설치되기 시작한 것이 거대한 뿔 모양의 혼 안테나였다. 이러한 뿔 형태의 안테나는 미국 곳곳에 건설되었고 그 중 뉴저지 홀름델에 위치한 혼 안테나에서 연구를 하던 사람들이 펜지어스와 윌슨이었다.

텔스타 위성의 모습 (출처: NASA)
홀름델 혼 안테나의 모습(출처: 위키). 현재 홀름델 혼 안테나는 네셔널 히스토릭 랜드마크로 지정되어 있다.

 같은 시기인 1950년대 천문학계에서 아웃사이더에 가깝던 조지 워싱턴 대학의 가모프는 그의 제자인 랠프 알퍼, 로버트 허먼과 함께 우주 초기의 빛이 아주 낮은 온도의 형태로 차가워져 우주 전역에 분포하고 있다는 내용의 논문을 발표한다. 여기에 표현된 ‘차가워진 온도’는 우주가 폭발로 팽창하고 있다는 빅뱅우주론을 증명해 줄 열쇠였지만 관측 난이도 자체가 어려웠고 가모프 본인조차도 이 이론에 의문을 가질 지경이었다. 이러한 이론의 증거를 찾으려던 사람은 프린스턴대학 천문학과 교수인 로버트 디키와 그의 연구팀이었다. 레이더 기술 전문가였던 그는 자신의 강점을 이용하여 막 시작하는 전파천문학의 기초를 쌓고 있었다.

조지 가모프(왼쪽)의 모습과 로버트 디키(오른쪽)의 모습. 디키는 가모프의 이론을 보지 않고 연구를 시작했다고 한다.

 다시 홀름델로 돌아와서, 1962년 텔스타 위성이 성공적으로 발사되자 혼 안테나는 그 신호를 잡아야 했다. 혼 안테나와 텔스타로 인해 전 세계가 하나로 묶이는 통신 기술이 빠른 속도로 발전하자 아이러니한 일이 발생하고 만다. 통신위성 기술을 독점하다시피 한 벨 연구소와 그 후원사인 AT&T를 견제하기 위해 케네디 대통령 서명 하에 통신위성법을 만들어버린 것이다. ( 위성 관련 사업을 국가 규제를 받는 기업인 COMSAT를 설립하여 넘겨버린다. ) 갑자기 끈 떨어진 연이 되어버린 벨 연구소에 남은 기기들은 과학자들이 다른 방식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건 펜지어스와 윌슨 역시 마찬가지였다.

혼 안테나 앞에서 찍은 펜지어스와 윌슨의 모습. 왼쪽이 윌슨이고 오른쪽이 펜지어스이다.

. 다시 프린스턴으로 와서, 로버트 디키는 자신의 이론을 이곳저곳에 열심히 알리고 있었다. 빅뱅이 일어나고 얼마 뒤 온 세상이 수많은 입자로 가득 차 있을 때 빛은 그 입자를 뚫고 움직일 수 없었다. 너무 높은 밀도 때문에 마치 만원 지하철에서 출구를 향해 나가야 하는 사람처럼 열심히 충돌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 와중에 우주가 점차 팽창하기 시작하니 만원 지하철의 크기가 넓어지는 것이다! 탈출이 수월해진 빛은 드디어 입자들을 뚫고 팽창하는 우주와 함께 여행을 시작한다. 아주 긴 시간 동안 우주를 여행하면서 빛의 파장은 조금씩 붉은 영역으로 밀려나고 (적색편이) 에너지 역시 줄어들기 시작한다. 우주가 점차 식어가기 시작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빛 입자는 전 우주에 걸쳐 돌아다니고 있을 것이다. 디키의 의견대로라면 전 우주 어느 방향에서건 시간과 상관없이 똑같은 형태의 신호가 잡혀야 했다. 빅뱅우주론의 운명이 걸린 그 신호를 찾기 위해 디키와 동료들은 프린스턴 대학 건물 옥상에 마이크로파 망원경을 설치하기 시작했다.

 다시 홀름델. 혼 안테나에는 위성의 신호를 받는 통신기기에서 전파망원경으로 점차 발전하기 시작했다. 펜지어스와 윌슨은 이 장치를 이용해 우리 은하에서 방출되는 전파신호를 연구하고자 했다. 그러나 연구는 금새 장애물을 만나고 만다. 예상을 뛰어넘는 잡음이 계속해서 잡히는 것이다. 심지어 이 신호는 혼 안테나의 방향을 어느 곳으로 돌리더라도 똑같이 나타났고 시간이 지나도 달라지지 않았다. 그렇다는 것은 이 신호가 어느 특정 천체에서 발생시킨 것도 아니고 지구에서 발생한 것은 더더욱 아니라는 것을 뜻했다. 이 과정에서 안테나에 집을 짓고 살던 비둘기 가족까지 내보내고( 펜지어스는 이 과정에서 치운 비둘기 똥을 ‘하얀색 유전체’라고 표현했다. ) 기계를 분해했다 재조립하는 수고를 하기도 했으나 잡음은 없어지지 않았다. 연구에 돌파구가 보이지 않던 두 사람에게 MIT의 천문학자 버니 디크가 한 가지 제안을 한다. 프린스턴 대학의 연구팀이 이런 신호를 찾고 있다고.

펜지어스와 윌슨이 발견한 우주배경복사 지도(출처: NASA)

 완전히 다른 연구를 하던 두 지점의 거리 차이는 고작 60km 정도였다. 그 짧은 거리를 연결한 전화 한통으로 디키는 자신들이 늦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반면 자신들이 잡은 신호가 뭔지도 모르던 펜지어스와 윌슨은 디키와 연결 이후 본인들이 발견한 것이 빅뱅의 증거인 ‘우주배경복사’라는 것을 알게 된다. 1964년의 5월에 발견된 이 신호는 이듬해인 1965년 5월. 펜지어스, 윌슨의 발견 논문과 프린스턴의 연구팀이 작성한 예측 논문이 동시에 게재되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된다. 빅뱅우주론이 주류로 확실하게 떠오른 순간이었다.

데이비드 윌킨슨(왼쪽)의 모습과 제임스 피블스(오른쪽)의 모습

 비록 1978년 노벨상 수상(펜지어스, 윌슨)의 주인공이 되지는 못했지만 우주배경복사 연구에 관한 열정은 당시 디키의 연구팀에 있던 과학자들에 의해 이어져 내려왔다. 당시 젊은 과학자였던 데이비드 윌킨슨은 우주배경복사 관측 위성인 COBE의 핵심 인사였으며 COBE 이후 발사된 WMAP 위성에는 아예 그의 이름이 붙게 된다. ( WMAP에서 W가 윌킨슨의 이름이었다. ) 마찬가지로 같은 연구진이었던 제임스 피블스는 이후로도 계속 우주배경복사와 우주론 연구에 큰 영향을 주며 그 분야의 대가로 남았고 2019년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가 되는 영광을 누린다. 펜지어스, 윌슨에게 한발 늦은 이후 무려 60여 년 만에 찾아온 상이었다.

WMAP로 만든 우주배경복사 지도. 펜지어스와 윌슨의 지도보다 훨씬 정교해진 것을 알 수 있다. (출처: NASA)

 흔히 과학자들 하면 갈릴레이, 뉴턴처럼 혼자서 수많은 연구를 진행하고 그 초석을 다진 인물들을 떠올린다. 그러나 현대 과학에서 ‘혼자하는 연구’라는 것은 없다. 현대 천문학 최고의 발견이라는 찬사까지 들었던 우주배경복사 발견은 펜지어스와 윌슨 자신들의 힘만으로는 알려질 수 없었다. 마찬가지로 디키의 연구팀 역시 자신들의 이론을 증명할 신호를 계획대로 찾았을지는 당연히 장담할 수 없다. 이처럼 수많은 노력과 인내, 그리고 실력이 모여 우리는 지금 우주의 시작에 한 걸음 더 다가갈 수 있었다. 지금 이순간에도 우주 곳곳을 여행한 오래된 빛이 온 우주에서 우리를 향해 쏟아지고 있다. 이제 그 빛에게 물어보면 된다. 여행 중 어떤 일이 있었는지, 어떤 것을 보았는지. 우주배경복사는 그 어떤 책보다 더 오래된 우주의 역사서이자 산증인일 테니까.


참고문헌

1. 제임스 기치. (2019). 다섯 가지 빛 이야기. (김영서 역). 황소걸음
2. 라파엘 슈브리엘. (2019). 우연과 과학이 만난 놀라운 순간. (손윤지 역). 북스힐
3. Rhodri Evans. (2015). The CMB: how an accidental discovery became the key to understanding the universe. the conversation.com. Retrieved from
https://theconversation.com/the-cmb-how-an-accidental-discovery-became-the-key-to-understanding-the-universe-45126
4. Mike Wall. (2014). Cosmic Anniversary: ‘Big Bang Echo’ Discovered 50 Years Ago Today. space.com. Retrieved from
https://www.space.com/25945-cosmic-microwave-background-discovery-50th-anniversary.html
5. 이창욱. (2020). [잠깐과학]’우주배경복사’ 발견하다. 동아사이언스.
https://www.dongascience.com/news.php?idx=37870
6. 이강환. (2015). 태초의 빛이 138억년의 비밀을 알려주리라. 한겨레
https://www.hani.co.kr/arti/science/science_general/717329.html
7. 이재구. (2013). [이재구코너]텔스타, 위성통신시대 열다⑦지구촌 시대. ZDNet Korea.
https://zdnet.co.kr/view/?no=20131230124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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